웰컴투동막골 시사회가 국회에서 열렸다.
아이가 태어난 이후로는 극장이라는 델 가본 적이 없어서 딱히 영화를 보고싶다기보다는 4년 만에 스크린 앞에 앉아보고 싶은 마음으로 평소 안 하던 짓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필자는 영화종료 10여분을 남겨놓고 자리에서 일어나야만 했다.
낙오된 남북한 군인들이 양민을 살리기 위해 미군 폭격기를 하나씩 떨어뜨릴 때마다 박수를 치게끔 만들어 놓은 셋팅을 앉아서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문화적 상상력을 가장한 사상적 테러의 공범이 될 수밖에 없다는 불편함이나 불쾌감을 훨씬 넘어선 혈압의 압력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반도 평화를 위해 영화가 시사하는 바는 영화등급대로 12세 이상이라면 절대로 오해할 수 없게끔 명쾌하게 표현되고 있다.

"남북이 하나되어 미국의 난폭한 전쟁의도를 꺾을 것이며 유사시에는 절대 열악한 무기일지라도 소총 나부랭이들을 치켜들고 물질문명의 첨단을 이루는 미국의 하이테크 쇳덩어리를 쏘아 떨어뜨리는 것이 한반도 평화를 지키는 방법이다"

아니라고? 거기까지는 아니겠지라고 상상력을 사용할래야 그렇게 할 수 없도록 감독이 쏙 넣어준 대사.

(검은 하늘에 총을 겨눈 채 점점 다가오는 연합군의 비행기 소리를 들으며)
겁과 추위에 떨던 한국 낙오병 曰 : 그러니까 우리도 연합군인거죠?
북한군 중대장 : 그렇네. 우리는 북남 연합군이네.
관객 : 감동!!

영화 자체는 CF 감독이 만들었듯이 순간순간 재치를 발휘해 즐거움을 주는 정말 CF같은 장면을 빼면 뭐라 할 얘기가 별로 없다.
테마나 모든 걸 다른 고전에서 노골적으로 빌려왔기 때문에 제작진의 상상력은 거론할 가치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주테마는 영화 '지중해'를 그대로 가져왔다.
지중해가 그리스의 섬이라면 영화 속 동막골은 나무꾼이 도끼자루 잊어버리고 발견함직한 '무림도원'이라는 것이 뚜렷한 차이일 뿐.

이 무림도원에 미군 비행기가 불시착해 스미스라는 조종사가 들어오고 민간인을 희생하며 다리를 폭파한 후 정신적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탈영한 한국군 공병장교와 순전히 낙오된 위생병 하나, 그리고 대원을 모두 잃고 북으로 가기 위해 일부러 험한 길을 택해 산을 타던 북한 패잔병 3명이 찾아와 겪게되는 알콩당콩한 이야기들을 충분히 예측 가능하게 풀어놓았다.

영화는 장르상 코메디임에도 사후에 있을 논란을 우려해서인지 여기저기 조심한 흔적이 보이긴 한다.
어찌 어찌해서 같이 농사를 짓게된 한국군과 북한군.
신세를 한탄하는 한국군이 북한군 졸병을 갈구며 "저것들이 쳐들어오지만 않았으면 지금쯤 종로바닥을 휘어잡고 있는 건데"라고 말하자, 북한군 졸병이 너덜이 쳐올라왔다고 따진다.
그 긴장을(관객이 느끼는 긴장임) 북한군 장교가 해결한다.
"우리가 쳐내려왔디"라고.

그러나, 영화는 평화의 적은 누가 먼저 쳐내려 왔느냐에 있지 않다는 것을 전반적인 무드로 충분히 보여준다.

동막골은 조선의 농촌이다. 양반도 상놈도 없다.
공동생산, 공동소비, 이 점이 아주 명확한데 스토리를 끌고 가는 곳간의 파괴는 마을의 공동 곳간이었다.
촌장의 집 마당에 있는 식량창고를 서로 싸우다 날려버린 남과 북의 군인들은 동막골에 머물며 곳간을 채우기까지 농사일을 돕기로 한다.

아름답고 알콩달콩한 마을을 보며 낭만주의적 공산주의자로 묘사되는 북한군 장교가 마을 촌장에게 묻는다.
소리 한번 안 지르고 마을 사람들을 이끄는 위대한 영도력의 근원이 뭐냐고.
촌장 曰 '무얼 많이 메겨야디'

이쯤 되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의 이상향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이들은 낭만적 공동체주의와 외세침략 이전의 조선이 이상향이었을 것이라는 민족주의(내가 대학에서 만난 주사파는 김일성 주의를 내세웠지만 실은 조선에 대한 향수를 가진 민족주의자였다), 지금 북한이 좀 많이 못 났지만 그래도 우리가 넉넉하게 품으면 같은 민족으로서 연대할 수 있다는 대북 화친론자들이다.

남북한 군인들이 전쟁의 복판에서 동화 같은 마을을 발견하고 이념이고 전쟁이고 다 잊고 함께 어울려 미식축구도 하고 썰매도 타며 놀다가 거짓말 같은 평화와 휴식을 잠시 맛보는데서 끝났다면 그런대로 유쾌한 CF파노라마를 본 소득은 있었을 것이다.
비록 영화 '지중해'의 한국식 번안이라 해도 말이다.

그러나 감독의 창작열은 영화를 비틀고야 말았다.
미군 비행기를 두 대나 떨어뜨린 북한의 방공포대를 섬멸하기 위해 미군은 동막골 주변의 폭격을 결정한다.
어쨌든 영화는 너무 깊은 산속이라 그게 민가인지 방공포대인지는 미국의 첨단장비로는 알 수 없다고 설정하고 알려고도 안 할 만큼 긴박하다고 억지를 쓴다.

스미스를 구하기 위한 특공대는 완전히 깡패였고 마을사람들을 무차별 폭행했다.
이미 군복을 벗어 양민으로 변한 남북한 병사들은 특공대를 제압하고 24시간 내에 미군이 마을주변을 폭격한다는 것을 알아낸다.
마을사람들에게 진 빚을 갚고 평화를 지키기 위해 추락 비행기에서 찾은 화기들을 갖고 '폭격유도' 작전을 펼치며 장렬히 산화한다는 것이 영화의 결말이다.
말이 폭격유도지 폭격기를 쳐부수는 전투였다.

잘 생각해보니 영화의 결말 부분은 로버트 드 니로의 '미션'의 마지막 전투신에서 빌려왔다.
마을사람들의 순박함의 세례를 받고 평화주의자로 변한 남북한 병사들이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마을을 파괴하기로 한 기계군단, 제국주의에 맞서 장렬히 산화한다는 것이 똑같다.
보진 않았지만 장렬히 산화하며 마을을 바라보며 죽어 가는 신하균의 눈빛은 그대로 로버트 드 니로의 그것을 빌려왔을 것이다.

미션은 코미디가 아니라 마을을 구할 수 없었지만 아마 동막골은 남북한 연합군의 희생으로 살아 남았을 것이다.
남북한이 하나되면 못할 것이 없다는 게 주제의 하나이기도 하니..

한국 대중문화가 얼치기 좌파들에게 장악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처음에 이들은 정사와 정론을 비틀고 헤집으면서 등장했다.
자유민주주의고 다원주의라면 뭐 이 정도 다양성은 참아줘야 하는 것 아니냐면서..성질 급한 반공민주주의자들과 순진하고 배부른 자유주의자들의 자중지란을 틈타서 말이다.

그러나 이제는 머리를 노랗게 물들이고 몸에 바짝 붙는 청바지를 입고, 세상을 재미있는 것과 재미없는 것만으로 나누는 것을 최고의 멋으로 알고 평생 살았을 대중예술 종사자들까지 이 비틈의 대열에 끼어들어 진보연, 좌파연, 민족연, 평화연에 아부하지 않고서는 '예술한다'는 소리를 못 들을 것 같은 강박증을 내보이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비틈이 정론을 꺾고 딴지가 주류를 완벽하게 소외시킨 것이다.
정론을 말하고 책임을 말하는 것은 적어도 대중문화에서는 이제는 웃음꺼리조차 되지 못한다.
창의력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을 수 없는 빽바지를 입고 무스를 쳐바른 감독에게 인권과 책임, 우방 등을 말하는 사람은 이제 동물원의 신기한 동물쯤으로 비쳐질 뿐이다.

오태민 (자유주의연대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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