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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의 위선은 국가적 재앙

사이버뉴스24 http://www.cybernews24.com/

 2014년 09월 05일 AM 03:49:15

차기 대권후보 1위인 박원순의 위선행보가 날이 갈수록 기록을 갱신하고 있다.


서민을 자처하며 월세 250만원 61평 아파트에 산다는 둥, 재산이 마이너스라는 둥, 뒷창이 괴상하게 닳아빠진 구두를 신고 언론 앞에 나서는 둥, 복지재원이 없어 지방채 2000억 원을 발행하면서 진돗개 3마리 훈련비 사료비 예방접종비 등에 서울시 예산 2,346만 원을 쓰는 둥 그야말로 점입가경이다.


잘 포장 되고 연출된 박원순의 구두는 박원순의 본질을 숨겨 주고 마치 고통 받는 청렴한 정치인처럼 국민을 호도한 위선으로 이러한 정치인의 위선이 권력을 장악하면 국가와 국민에게 얼마나 해독을 끼치는지 古事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중국의 삼국시대까지 나라를 말아먹거나 찬탈한 4대 역적을 망탁조의(莽卓操懿)라 부르는 바, 전한을 멸망시키고 신(新)나라를 건국한 王莽, 삼국지에 나오는 董卓, 曹操 그리고 조조의 위나라를 전횡한 司馬懿의 이름을 딴 조어이다.

이중 가장 비난을 많이 받는 王莽의 위선과 권모술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어느 날 왕망의 어머니가 병이 들자 귀족들이 다투어 문병을 갔는데, 사람들은 왕망의 검소한 생활에 깜짝 놀랐다.

마중 나온 왕망 부인의 의복이 너무도 초라하고 겨우 무릎을 가릴 정도로 짧아서 하녀로 착각될 지경이었던 것이다.

한번은 왕망의 차남이 집안의 노예를 죽인 사건이 있었다.

당시는 노예를 죽이는 것은 그다지 중한 죄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왕망은 아들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게 했다.

육친조차 용서하지 않는 그의 엄정한 태도는 부패가 만연한 당시 사회에서 사람들의 얘깃거리가 되었다.


왕망은 자신의 딸을 황후로 삼고 점차 실권을 장악해나갔다.

38세에 이미 재상인 대사마가 되어 왕씨 일족을 대표하는 지위에 올랐으며 한나라를 평안히 했다는 안한공(安漢公)의 칭호를 얻었다.

부명(符命, 일종의 예언서)에 근거한 정책을 실시하는 한편, 민중의 지지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고, 외모나 대인관계에 특히 집착을 보여 의식 때에는 수염이나 머리를 검게 물들여 좀 더 젊게 보이려 한 반면, 서상 같은 신비주의적인 도참설을 이용해 자신의 등용과 즉위를 정당화시켰고, 자신이 주위의 추천에 못 이겨 마지못해 받는 시늉을 하는 등 간계와 지모에도 능했다.


마침내 평제를 살해하고 두 살 배기 유영을 황태자로 삼은 후 스스로 가황제가 되더니, 참위설을 이용하여 자신의 즉위가 하늘의 뜻이라는 여론을 조작하여 진천자가 되었다.

“안한공 왕망은 황제가 되라”는 붉은 글씨가 쓰여진 흰 돌을 조작하거나, 황제가 되라는 하늘의 의사표시로 간주되는 새 우물을 조작하거나, 한 고조의 영혼에게 선양을 받았다는 등의 신비주의적 작태를 조작하여 자신을 천명(天命) 받은 자로 부각시킨 후, 유영이 자신에게 왕위를 넘겨주는 형식으로 황위에 올랐다.


태황태후로서 전국옥새(全國玉璽)를 맡고 있던 효원황태후 왕정군은 옥새를 받으러 온 왕망의 사촌형제 순(舜)에게 왕망에 대한 욕설을 퍼붓고, 순이 옥새를 내어줄 것을 재촉하자 옥새를 내던지며 “너희 일족은 모두 멸망할 것이다”라 저주했다고 한다.


황제가 된 왕망은 전국의 토지를 모두 황제의 소유인 왕전(王田)으로 하며 따라서 개인의 토지매매를 금했으며. 이는 농민들의 반대뿐만 아니라 많은 중소지주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국내가 혼란스러워지자 왕망은 국민들의 주의를 밖으로 돌리기 위해 대외정책 면에서 중화사상을 내세워 주변제국의 왕들을 후로 격하시킴으로써 각국의 이반을 초래하고, 고구려를 하구려로 바꿔 불러 충돌하였고, 한동안 잠잠하던 흉노를 격분시켜 북방에는 다시 전운이 감돌았다.

이에 왕망은 강제노역을 시키고, 각종 가렴잡세(苛斂雜稅)를 징수했으며, 관리들이 백성들을 압박하고 착취하게끔 종용했다.

농민들은 참다못해 결국 봉기를 일으켜 정부에 대항했다.


적미군과 녹림당으로 대표되는 농민반란이 전국을 휩쓸었다.

번승을 우두머리로 한 북방의 농민군은 눈썹을 붉게 칠해 관군과 구별했기 때문에 적미군으로 불리었는데, 도가적 경향이 강한 비밀결사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왕광, 왕봉이 이끄는 농민군은 호북성 녹림산에 근거를 두었기 때문에 녹림당으로 불리었다.


그러나 막상 권력을 장악한 세력은 호족이었다.

하남 남양의 대표적인 호족인 유연 유수 형제는 녹림군과 연합했다가 점차 주도권을 장악해나갔다.

이들은 일족 중 유연을 임시 황제로 세우고 곤양의 싸움에서 왕망의 대군을 격파한 후 장안으로 향했다.


왕망은 죄수를 풀어 군대를 충당하고 이에 대응했으나, 군 내부에서 쿠데타가 일어나고 성내의 백성들이 봉기군에 가세함으로써 위기를 맞았다.


최후의 순간에도 왕망은 “하늘이 나에게 사명을 주었는데, 한나라의 군사가 나를 어찌하랴”라고 큰소리를 쳤으나, 불타는 궁전을 버리고 이리저리 피해 다니다가 난병에게 살해당했다.

이때가 기원후 23년, 신나라는 불과 15년 만에 역사상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배성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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