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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워쳐(14) - 民族災殃의 씨, 金正日 철저해부 -2
後繼者의 길에서 만나 본 실상과 허상

사이버뉴스24 http://www.cybernews24.com/

 2006년 10월 16일 PM 08:10:39

1964년 <社會主義 건설에 있어서 郡의 위치와 역할>이란 졸업논문으로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한 김정일은 4월21일 조선노동당중앙위원회 본부에 들어가 조직지도부 보조지도원이 되었다.
공식 지위는 낮지만 아버지의 후광이 한몫한다.
대뜸 조직지도부나 선전선동부, 문학예술부문의 간부들을 모아놓고 훈육을 한다.

1967년에 선전선동부 문화예술과장에 오르면서 당의 唯一思想化를 내걸고 당내 修正主義分子, 二重분자들의 적발에 나선다.
67년 68년의 甲山派, 反革命派 숙청의 회오리를 몰고 왔다.
혁명가극, 영화 문학 등을 통해 항일무장투쟁의 유일혁명전통화와 김일성 일족의 우상화가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1972년에는 선전선동부장의 요직에 오르고 김일성 뱃지 착용의 전사회적 보급을 추진했다.

여세를 몰아 黨中央組織指導部長의 요직에 있던 작은아버지 金英柱도 몰아내고 당내 실권을 장악한다.
이 무렵부터 계모 김성애나 그 자식들을 <곁가지>로 부르고 "옹이를 잘라내라"고 지시, 그들 배제에 착수한다.
사교나 공개장소에 등장을 금지하고 이복형제자매들을 외국으로 내쫓고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에 이른다.

공교롭게도 김정일의 곁가지 치기는 1971년서 1973년에 걸쳐 최초의 南北對話가 이뤄지면서 북한이 大轉換期에 직면한 때와 일치한다.
김정일은 1973년 초에 시작되는 <3大革命小組>운동의 선봉에 서는 동시에 그해 9월에 당중앙위원회 書記(조직 및 선전 담당)에, 이듬해 74년 3월에는 당정치위원회 위원에 뽑혀 유일 후계자의 지위를 당내에 확립하게 된다.

실은, 그 직전 1974년 2월에 김정일이 작성했다고 전해지는 <당의 唯一思想體系 확립 10대원칙이 제정되어 있다.
이것은 김일성을 <위대한 首領>으로 떠받들고 절대숭배 절대복종의 대상으로 한 조문(후에 전문을 소개한다)을 담고 있다.
10대 원칙 마지막 항에는 수령의 혁명위업을 <代를 이어 최후까지 계승 완성해야한다>고 되어 있다.
그 해설문에는 <수령의 영도> 하에 <당중앙의 유일적 지도체제>를 두고 거기에 <무한 충실할 것>, <당중앙의 권위를 백방으로 보호하고 당중앙을 목숨을 걸고 사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되어 있다.

이 때부터 김정일은 자기를 <당중앙>으로 부르게 하고 당 출판물 등에 <당중앙의 지시>, <당중앙의 발의>라고 되어 있으면, 이는 김정일 개인을 가리키는 관례로 확립했던 것이다.
그리고 <대를 이어>라는 형용사가 김일성으로부터 김정일로의 권력세습을 암시하는 말로 그 후에도 사용되고 있다.

6개년 계획을 당 창립30주년 기념일까지 순조롭게 완성한다는 목표가 어려워졌을 때, 김정일이 솔선해서 경험도 없이 경제 지도를 떠맡아 즉석에서 <70일 전투>를 외쳐 성과를 올려 그의 대담성을 샀다는 일화도 그 해 74년 10월의 일이다.

김정일 발의라는 <速度戰 電擊戰 殲滅戰>, <生産도 生活도 學習도 抗日遊擊隊式으로>, <主體사상으로 전 사회를 일색화하자> 따위의 슬로건이 전 국토에 난무한 것도 이 시기였다.
이런 과정을 거친 후 1980년 10월의 조선노동당 제6차 대회에서 김정일은 기고만장하게 당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서기, 군사위원 등 3개 요직을 겸무하는 김일성 이외의 유일한 최고간부가 되었다.
경쟁자 없는 유일후계자로서 公認된 것이다.

과거나 현재나 김정일은 자기의 사생활을 비밀과 신화 속 베일에 감추고 있다.
그는 공식석상에서 연설 한 적도, 보고 하적도 없고, 단 한번 군사퍼레이드 단상에서 <조선인민군에 영광 있어라>는 목소리를 낸 장면 하나가 그의 공개발성의 유일한 기회였다.
그저 앞뒤 생각 없이 길게 늘어놓은 長廣舌의 논문이나 담화기록 인쇄물을 발표하고 그것을 학습하도록 강제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의 활동상을 기록한 동영상 필름으로부터도 발음과 발성을 모두 지우고 해설자의 나레이션으로 바꾸어버렸다.
미루어, 김정일의 언어능력에 문제가 있으며 그 때문에 김일성 사후에도 최고위직에 취임하지 않았다는 설도 있는가 하면, 자신을 神格化하기 위한 연출일 따름이라거나 표면에 나서지 않는 겸손한 인품 때문이라는 등의 설이 분분하였다.

그러나 매우 확실한 정보에 의하면 김정일이 중국을 비공식방문 했을 대 연설을 요청 받고 원고를 준비하여 단상에 오른 것까지는 좋았으나, 도중에 원고를 이탈하여 연설이 支離滅裂해지고 말았다.
귀국 후 아버지 김일성의 호된 질책을 받고 깊은 트라홈에 걸려 그로부터 연설이나 보고 같은 대중 앞 발표력을 잃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김정일의 언어능력 때문이라기보다 그의 신경증적 소심성을 말한다.
이와 관련해서 그의 短氣, 躁急性을 말하는 에피소드도 많다.
<속도전> 구호에 의한 건설운동도 그 징후의 하나다. 단기는 또 성깔부리기로 이어진다.
그를 만난 적 있는 간부나 업무관련 자들은 거의 웃는 얼굴을 보지 못했으며 무표정한 얼굴로 언제 불호령이 떨어질지 전전긍긍한다는 것이다.

김정일의 24시간 집무나 深夜執務는 유명해서 한 밤중에도 어떤 명령이나 질책이 떨어질지 몰라 전화 앞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한다.
성난 목소리가 들리면 수화기를 멀리 떼고 듣다가 대꾸도 못한 채 졸도하고만 간부도 있다고 한다.
소심증이 돌변해 폭군이 되는 것이다.

이 같은 그의 怪癖은 사소한 데까지 간섭하다가 아랫사람에게 주의를 주고 다시 고치도록 타이른다는 성벽(북한에서는 소위 광폭 정치라는 미담으로 전한다)에서도 잘 들어난다.
개중에는 管絃樂 연주를 듣다가 한 주자의 반음 틀린 데를 짚어내고 연주를 중지시켰다거나 여럿 仙女가 나오는 무용 리허설을 보고 “조선에는 여덟 선녀의 전설이 있으니 무용수를 8명으로 하라던가 아주 세세한데까지 간섭을 한다.

일국의 최고 지도자라는 자가 이런 성벽의 소유자임에도, 어느 노벨평화상 수상자는 그를 가리켜 식견 있고 말이 통하는 인격자로 추켜세워 나라의 부를 갖다 바치면서까지 白日夢 같은 宣言을 함께 하고 햇볕을 쪼여 줬지만 그 후 돌아 온 것은 과연 뭐였나?
"까불면 原子爆彈 던진다" 말고.... --후 속--

-- 오늘도 시청광장에서는 자유민의 함성이 울려퍼질 것이다. 다 함께 나가 외치고 전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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