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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워쳐(22)-中北간 詛呪의 맞불
김정일이 등소평을 수정주의자로 매도, 격노시켜 김일성이 달려가 사죄하고....

사이버뉴스24 http://www.cybernews24.com/

 2006년 11월 12일 PM 08:27:26

오늘 날 중국과 북한과의 관계를 밑바닥에서 들여다보려면 20여 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물론 김일성 생존시였다.
1983년 6월 김정일이 중국을 비밀리에 방문한 이후 김일성 시대의 北中간의 <피로 굳어진 우의관계>는 청산되고 대신, 중국의 등소평과 김정일과의 상호부정적인 원망과 불신감이 양자관계의 바탕을 이루게 되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1983년 6월 1일부터 12일까지 비밀리에 중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김정일은 곧바로 15일부터 3일간 북조선노동당 중앙위 제6기 7차 회의를 소집하고 귀국보고를 했다.
그는 많은 참석자들 앞에서 <중국공산당에는 이미 사회주의, 공산주의는 완전히 없어져 버렸다. 있는 것은 수정주의뿐이다. 중국이 국시로 하고 있는 '4대 현대화' 노선도 '자본주의에의 길'= 수정주의 노선 말고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고 격렬히 비난을 폈다.

회의 참석자가 많았음일까, 이 비난사실은 며칠 만에 모두 중국에 알려졌다.
혁명활동에서 김정일과는 비교도 안 되는 선배로서 많은 실적을 가진 중국의 최고지도자를 함부로 <수정주의자>로 매도하고 <4대 현대화>까지를 '수정주의 노선'이라고 몰아 부친 것이다.

등소평은 격노하면서 하늘을 우러러 측근에 <아아-- 이 무슨 변괴인고! 도대체 이유를 모를 젊은 아이에게서 중국의 명운이 위협 받는 사태를 맞아야 한단 말인가......>라고 개탄하였다고 한다.

이때 등소평은 김정일을 <햇병아리>라고 불렀다.
그거야 어떻든, 혁명가로서 확고한 실적을 가진 등소평에게 이름도 없는 일개 햇병아리 김정일이 혁명가가 가장 싫어하는 <수정주의자>라고 낙인을 찍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이 국시로 하는 <4대 현대화 >노선까지를 <수정주의 노선>으로 몰아부쳤으니, 이는 등소평의 전인생과 중국의 혁명실적에 대한 전면적 부정일수 밖에 없었다.

등소평의 당혹스러움과 분노가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의 가슴에 못질을 한 자가 더구나 누구도 아닌 맹방 북조선의 차기 권력자로 등장하려는 자였으니.....등소평이 가슴을 떨며 危懼心(위구심)을 품었으리라는 것 또한 짐작하고도 남는 일이다.

김정일은 이렇게 해서 북한의 차기 주석 후계자로서 첫 해외방문으로 이루어진 중국방문 단계에서 중국과의 사이에 기본적으로 미묘한 위구심과 우려와 불신감을 잉태하는 막을 열고만 것이다.

등소평은 1997년 2월 19일 천수를 다하고 갔다.
그러나 등소평의 위구심과 우려와 불신감은 그의 죽음과 함께 Post-등소평 시대에로의 이행이라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더 한층 <등소평 유언>으로서의 역할을 증폭시켜 북한 사정에 친숙치 않은 차세대 중국 지도자들 간에 지금도 살아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김정일의 방중에 얽힌 이상의 문제에 대하여 심각한 토의를 거듭한 중국 지도부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다달았다.                                                                                                      1. 중국이 <4대 현대화>를 실현하기까지는 금후 수십 년은 걸린다.                                   2. 이 기간 중, 중국의 주변정세가 안정되고 평화적이어야 하는 것이 절대 필요불가결하다.
김정일이 북한의 지도자가 되는 날에는 한반도, 동북아 정세의 안정화는 그림의 떡이 될 우려가 있다.                                                                                                                      3. 이와 관련해서 김정일을 아무리 설득한다 하더라도 본심에서 이해와 협력을 얻을 가능성은 적다. 이를 위해서는 중 조관계의 역사적 경위를 잘 알고 인간적으로도 신뢰 가는 김일성과 잘 협의해서 금후 반도의 안정유지 방향으로 조건을 받아두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렇게 해서 등소평이 솔선해서 조속히 김일성과의 <중-조 수뇌회담>을 갖기로 한 것이다.      1983년 8월, 등소평은 예년과 같이 여름휴가 해수욕 스케쥴을 핑게삼아 중국의 당 정부간부들의 휴양지 北戴河로 향했다. 여름의 북대하라면 예년처럼 민감한 중국 워쳐들의 이목을 끌 일도 적다. 등소평다운 기발한 착상이었다.

그런데 8월 19일 돌연 그는 은밀히 지척의 거리에 있는 대련시의 휴양지 봉수도 호텔에 모습을 드러냈다. 가끔 이 호텔에 투숙하고 있던 외국상사 주재원 수명이 급히 퇴거해 달라는 호텔측 요청에 이유를 물었다. 이런 사태에 능숙치 못한 호텔 종업원들의 훈련부족 탓일까, 극비회담 개최사실이 탄로 나고 말았다.

그 후 심지어 등소평의 방문을 기념해서 鄧-金 양수뇌가 담소하는 커다란 사진까지 호텔 로비에 걸린 것으로 보아 극비회담은 비밀이 아닌 것으로 된 것일까.....

같은 날 즉, 8월 19일 김일성도 극비리에 이 호텔에 도착해서 수뇌회담이 실현되었다.
뒤에 중국 측으로부터 새어나온 말에 의하면 회담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으로 밝혀졌다.

즉 등소평은 그해 6월의 김정일의 비밀 방중시 그의 <바람직하지 못한 태도> 특히 귀국후 당 중앙위에서의 중국 비판비난 사실에 대해 상세히 솔직히 언급, <이는 중국으로서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문제>라고 엄중히 지적하고 중국 지도부가 직면하고 있는 정치정세를 상세히 설명함과 동시에 양국의 역사적 전통적 우의관계와 혁명적 우정에 비추어 양국의 장래에 있어 불안과 위구심을 제거하도록 선처해 줄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그리고 북한측이 중국의 <4대 현대화>노선을 지지하고 이와 동조해서 북한 경제의 향상과 활성화에 나서도록 요청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에 대해 아들 김정일의 하는 꼴을 잘 알고 있는 김일성은 중국 측의 지적에 반론의 여지없이 머리를 숙여 경청하고 <김정일을 잘 타이르고 가까운 시일 내에 중국을 사죄방문 시키겠으니 그 때 본인에게 교훈을 줄 것을 간청한다.>고 함으로써 겨우 등소평의 승락을 얻었다고 한다.

사죄하기 위해 중국을 다시 방문한다는 것은 김정일로서는 참을 수 없는 노릇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정일은 애비의 말에 더 이상 거역 못하고 그해 9월 마침내 중국을 재방하게 된다.

 <華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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