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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워쳐(23)-고양이 앞에 쥐가 된 金正日
父子 갈등 속 사죄방문하고 등소평 앞에서는 시종 차렷자세로.....

사이버뉴스24 http://www.cybernews24.com/

 2006년 11월 14일 PM 11:37:21

김정일의 중국사죄방문은 1993년 9월에 있었다.
이번에는 앞서의 태도와는 전혀 달리 등소평으로부터 의자를 권유받고도 앉지 않고 그의 앞에 차렷 자세로 선 채 등소평의 훈계를 들어야했다.

중국 측도 김정일을 설득하기 위해 심천경제특구에 안내하는 등 <4대 현대화>의 이론과 실제에 관해 진지하게 설명을 해줬다.
김정일도 자못 신중하게 듣는 척, 언행에 각별히 조심하는 눈치였다.
중국측은 <이번 김정일의 방문에서는 '적극적인 반응'이 보였다>고 평양에 통보, 양해되었음을 알려줌으로써 김일성을 안도시켰다.

이렇게 되기까지 김일성으로서는 아들 김정일과 많은 갈등을 겪어야했다.
앞장에서도 언급했다 싶이 사죄하기 위해 중국을 다시 방문한다는 것은 김정일로서는 참을 수없는 모욕이었다.

김정일은 아버지 김일성의 설득에 대해 <중국이 수정주의 길을 걷는다 해도 그것은 중국 문제이므로 그들 할 탓이다.>, <주체사상에 의한 일색화를 목표로 하는 우리나라가 중국이 하라는 대로 할 이유는 없다. 수정주의를 엄격히 구별하고 그의 침투를 단호히 배제해야한다.>고 항변하고 중국 사죄방문을 반대했던 것이다.
이것이 후일 김정일 주변에서 구호로 등장하게 되는 <우리식>의 바탕이 되었다.

이로 미루어 김정일의 사죄방문이 이루어지기까지 부자간의 반목, 반발, 반항이 오죽했겠는가는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좀 다른 이야기지만, 이 시기에 북한은 이때까지 취해 온 <한국 전두환 정권과는 남북대화 상대로 하지 않는다.>는 태도를 바꾸어 1983년 10월 8일, 중국 지도부에 대해서 미국, 한국, 북한의 <3자회담> 개최 안을 미국 측에 중재해 줄 것을 의뢰하였다.
이것은 두말할 여지없이 그 해 8월 鄧-金 수뇌의 극비회담 시 중국 측이 북한에 대해 정책전환을 진지하게 설득한 결과였다.

등소평과 김일성 간에는 일응 양해가 되었다손 치더라도, 등소평의 중국과 김정일 간에는 아무 것도 이해된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1983년 6월의 비밀방중에서 봉수도 극비회담을 거쳐 재차 사죄방문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경위와 결과라는 등소평의 '친척 큰아버지' 같은 간섭은 김일성에 품었던 김정일의 끝없는 열등의식을 새삼 자극하고 중복 작용하여 그의 풀리지 않는 등소평-중국에 대한 반발과 반목심리로 굳어버린 것이다.

그것이 나중에 韓中 國交수립(1992)에 반발을 가져왔고, 나아가 김일성과의 의견 대립 결과 2년 후 김일성이 말다툼 끝에 총격사하는 遠因으로 작용한 것이리라.

등소평이 김정일에 품은 의구와 염려는 빨리도 현실로 나타났다.
김일성이 중국에 대해서 <3자 회담>안의 對美 중재를 의뢰한 다음 날, 1983년 10월 9일 버마의 수도 랭군의 아웅산 묘에서 일대 爆死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사건 발생 후 즉각 그 진상이 밝혀진 사실이지만, 김정일의 대남테러행위가 엉뚱하게도 버마에서 자행된 것이다.

당시 버마를 방문 중이던 한국의 全斗煥 대통령 일행을 노린 김정일의 테러행위로써 북한 특수부대 공작원 3명에 의해 자행된 이 사건으로 한국정부 각료 4명을 포함한 16명의 목숨을 앗았고, 버마인을 포함하여 다른 15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회담 중재 알선을 부탁 받은 중국의 체면이 여지없이 뭉개진 사건이었다.

이 테러사건은 사건 발생 후 자폭을 시도하다 부상, 체포된 범인 인민군 소령 진 모와 강명철 대위의 진술, 그리고 기타 증거로 김정일의 직접 명령을 받고 자행한 것임이 명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정일은 사실을 완강히 부인하고 도리어 중국에 대해 버마에 영향력을 행사하여 사건을 유야무야시켜 진상을 덮어주도록 요청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타국의 주권을 침해하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자의적인 국제 테러리즘 사건으로써 중국의 주변정세의 안정화에 대한 바램을 크게 위협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으로 하여금 버마에 대한 압력행사 문제로 국제 테러리즘에 가담할 것이냐 말 것이냐의 기로에 서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중국은 결국 북한의 요구를 거부했지만, 거기에 대해서도 김정일로서는 중국에 대한 원망이 여전하다고 보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그로부터 종주국 소련이 망하고 공산권이 붕괴되는 격변사를 거쳐 김일성 등소평 모두 죽음으로써 두 맹방의 혁명 1세대가 살아진 지금 피로 굳어진 중 북간의 우의관계 대신 냉엄한 현실문제만이 양자간에 걸려 있다.

김일성의 급서시 등소평의 특명을 받고 조문 갔던 중국 인민해방군 총정치부 부주임이며, 등소평의 공보실장 王瑞林에 의해 북한 측에 전달된 <중국의 대 북조선 정책 6개 항목>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중국 측으로서는 여전히 유효하다.

중국의 대 북한 요구6개항을 요약하면....
1. 국가건설과 경제발전이라는 김일성의 유지를 확고히 지지하고
2. 한반도의 비핵화를 희망하며
3. 구실을 붙여 군사충돌을 일으키지 말 것이여
4. 이상을 지키기만 하면 중국의 가능한 원조를 제공할 것이고
5. 김일성 유지를 이어가면 중-북의 우호관계가 계속될 것이며
6. 양국의 전통적 우호와 지역의 평화안정 입장에서 중-조 우호협력 상호원조 조약의 수정 용의가 있다.

그러나 북한은 이 6개항의 요구를 공식적으로 확인하기를 회피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무엇보다도 중국의 대북한 요구의 핵심은 김일성 유지에 따른 非核化와 地域平和의 유지에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북한으로 흐르는 파이프라인을 쥔 중국의 새로운 세대가 확고히 이어가고 있는 등소평의 <4대 현대화 정책>에 장애가 되는 김정일의 호전성이 언제까지 묵인될 것이냐가 남북한 간 나아가 동북아 평화유지에 관건이 된다고 보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華山>

* 개인사정으로 이 연재가 잠시 중단됨을 양해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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