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한병희>

'국보법' 폐지 對 '정체성' 위기.. 발전성 없는 논쟁으로 허성세월.. 따가운 여론 눈총은 안중에도 없어 - 정치권이 '국가정체성'과 '국가보안법폐지'라는 두 개의 노선을 가운데 두고 서로 마주보고 달리고 있다.

한나라당은 '국가정체성이 흔들리면 대한민국의 간판을 내려야 한다'며 연일 정부의 정책 기조를 비판하고 있는데 비해 열린우리당은 그동안 거론돼 오던 '국가보안법폐지'를 서둘러 폐기하자는 입장을 고수하면서 여야 감정의 골은 이제 극과 극으로 치닫고 있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국가정체성위기' 발언이 점화된 후 당내 여론은 '국가정체성 문제가 경제성장의 발목까지 잡고 있다'는 반응을 나타내고 있다.

4일 김덕룡 원내대표는 '헌법을 수호할 수 있는 특별기구를 당내에 설치'하는 방안을 신중히 검토 할 것이라고 밝혀 여야의 전면 대립 양상은 날이 갈수록 더욱 가시화 될 전망이다.

특히 한나라당은 '국가정체성위기'문제가 거론된 후 열린우리당이 '색깔론'에 지나지 않는다고 반박하고 나서자, 이는 국민과 야당을 우롱하는 처사에 지나지 않는다며 비난의 수위를 높이고 있다.

이에 맞서 열린우리당의 국가보안법폐지 입법 추진위원회는 법 폐지에 따른 초안이 마무리되는 이달 말쯤부터 서명 작업에 착수, 국보법폐지 작업을 본격 시작한다는 방침이다.

여당의 이번 국보법 폐지는 찬양.고무죄 및 남북교류협력법 등 많은 법 조항이 헌법에 위배돼 아예 폐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정치권의 그동안 논란이 본격 실행단계에 이른다는 점에서 매우 주목되는 부분이다.

한나라당은 국가정체성 문제를 두고 더욱 한치의 양보도 못하겠다는 기조를 유지하고 있는데 반해, 열린우리당의 국보법폐지 추진은 해석하기에 따라 서로 각자의 방향을 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여당의 국보법 폐지에 따른 서명작업 움직임 등은 정치권에 또 다른 뇌관으로 작용, 여야의 대치현상은 더욱 심각하게 발전할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다 최근에는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이사장으로 있던 '정수장학회'문제를 둘러싸고 여당이 집중공격을 펼치는 가운데, 4일에는 열린우리당 한명숙 상임중앙위원이 "박 대표가 국가 정체성 문제를 물고 늘어지는 것은 나라를 이끌고 나갈 미래에 대한 비전이나 철학이 없다"는 것이라고 주장, 여야의 '국가정체성'위기론과 '국보법폐지'움직임에 따른 대치현상은 이제 그 한계선을 넘어선 듯한 분위기다.

'국보법' 폐지되면 '국가정체성'은 의미없는 낱말

현재 열린우리당이 추진하고 있는 국가보안법 전면폐지의 근본취지는 '남북교류협력법 등 헌법에 위배되는 조항이 많고 형법에도 관련조항의 중복규정이 많기 때문에 폐지가 마땅하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국가보안법은 말 그대로 '국가의 안보(安保)'를 위해 존립하는 법이기 때문에 전면폐지 될 경우 민주주의 전통 사상이나 체제 혼란 등 적지 않은 문제들이 발생할 수 있어 신중을 기해야 되는 부분이다.

예를 들어 국가의 체제전복을 노리거나 반(反)국가단체의 구성 등 국가의 혼란을 초래하는  범죄가 발생하더라도 국가보안법이 폐지된 상태에서는 '국가범'이 아닌 '개인범'으로 처리할 수 밖에 없다.

물론 형법이나 기타 다른 법률에 이와 비슷한 법조항들이 중복 규정돼 있기는 하지만, 관련 범죄의 처벌 수위나 행위의 경중이 일개 개인의 범죄로 취급된다는 점에서 여러 가지 사회적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 

특히 남과 북이라는 개념이 없어지게 되고, 사상의 전향이나 '국가정체성'논란과 같은 말들은 한낱 쓸모없는 단어로 전락해 민주주의 속에서 사회주의 사상이 공존하는 기묘한 현상이 만들어지게 된다.

이는 민주와 사회주의 현상이 한 공간에서 상존함으로서 생기는 각종 갈등과 분열현상, 심지어 과격한 충돌현상까지 빚어질 수 있음을 예고하고 있다.

      
국가정보원, NSC 등 안보기관도 전면 폐지돼야

국보법 폐지와 관련, 열린당의 추진안 대로라면 머지않은 시간안에 이 법은 대한민국 법전에서 사라지게 된다.

또 국보법이 폐지될 경우 국가정보원과 국가안정보장회의(NSC) 등과 같은 안보기관은 그 존재 가치가 없어지므로 당연 폐지대상이 된다.

뿐만 아니라 국보법으로 인해 인권침해를 당한 사람들에 대한 보상, 남파간첩이나 빨지 출신들도 정당하게 민주화 인사로 인정받을 수 있다. 또 이들에 대한 보상 문제도 당연히 소급 적용된다.

현 정권 들어 북한이 '주적'이라는 개념도 없어졌고, 탈북 난민들도 사상 유래없이 많이 입국하고 있는 추세다. 이는 곧 이미 국가보안법이라는 법은 사실상 존재하지만 이미 그 법은 폐기된 것이나 다름없음을 반증하는 부분이다.

지난 30일 국정홍보처가 운영하는 국정브리핑 홈피에 '김일성 주석 조문 가자'는 내용이 오를 정도로 현 정권은 대북옹호 정책과 친밀감 표시에 유달리 집착하고 있다.

실상이 이렇다 보니 원내 제1야당인 한나라당은 '국가정체성'위기론을 집중 부각시키며 대정부 비판 공세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고, 이에 맞선 열린우리당은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를 향해 '유신독재자의 딸' '정수장학회'문제까지 들고 나오며 맞불을 놓고 있다.

국보법 폐지에 따른 與野 대치상황과 전망

4일 첫 모임을 가진 열린우리당 국가보안법 폐지 입법추진위원회(임종석,우원식,이상민 의원)의 움직임으로 볼 때 국보법 폐지는 이달중 실무작업과 함께 당론을 모으고 월말쯤이나 내달초 본격 서명작업에 돌입할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되면 현재 한나라당이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헌법과 정통성 수호 대책위원회(가칭)'와 열린당의 국보법 폐지 움직임은 서로 정 반대의 정책 노선을 지향하게 되는 것이므로 상호 충돌이 불가피하다.

또 열린당이 실무작업과 서명을 마치고 국보법 폐지법안을 입법하게 된다 하더라도 한나라당이 강력 반대하고 나설 것으로 보여 법안 폐기까지는 상당한 논란이 예상된다.

이와 반대로 한나라당은 '국가정체성'위기를 현 정권의 최대 이슈로 부각시켜 청와대와 정부,열린당을 집중 공격함과 동시에 열린당에 비해 수적으로 불리한 부분을 메우기 위해 민주당,자민련 등과도 연대를 모색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최근의 여야 대치 상태가 상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상호 방호벽을 쌓고 있다는 점에서 정치권은 당분간 '앞으로의 전진 개혁이 아닌 과거로의 후퇴 개혁'을 지향할 것으로 전망된다.

권혁철 기자 khyukc@massmedianews.com